경주 최씨 종친회 최염 회장이 경주 교동 최씨 고택을 찾았다. 경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1970년 서울 무교동의 한 주점. 당시 서른일곱이던 그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고교 동창생 두 명과 회포를 풀러 평소 다니던 단골집에 온 터였다. 셋은 학교생활을 추억하며 왁자지껄 술을 마셨다. 그러던 중 최씨의 무슨 말 때문이었을까? 어느 순간 친구 둘의 안색이 굳어졌다. 차례로 화장실에 간다면서 자리를 떴다. 최씨는 그래도 남은 술을 다 먹고 가겠다며 혼자 남았다. 얼마나 지나지 않아 경찰관이 들어왔다.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하겠습니다.”-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거죠?“친구들이 물었죠. 너희 가족 전 재산을 넣은 대구대학교를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에게 넘겼는데, 그 이병철이 박정희한테 상납을 했으니까 굉장한 보상을 받았을 거 아니냐? 나는 이병철한테 돈 한 푼 받은 거 없고 우리 할아버지도 그럴 분 아니라고. 화가 나서 큰 소리로 말했죠. 박정희, 이병철이 정경유착해서 남의 것 빼앗고 나라 팔아먹은 사람들 아니냐….”신고한 사람이 종업원이었는지 친구들이었는지 아직도 그는 모른다.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을 마친 뒤 유신체제를 준비하고 있던 시절, 종로의 술집 종업원들을 정보과 형사들이 모아두고 수상한 사람은 즉각 신고하라고 교육하던 시절이었다.-경찰에 끌려가서는요?“구둣발로 차이고 실신하고… 밤새 조사를 받았습니다. 조서를 보니까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이 쓰여 있더라고요. 내가 종업원들한테 ‘이북 가면 대접받는데 왜 여기서 술심부름이나 하고 있냐’고 했다는 겁니다. 게다가 내가 이북에 갔다 왔다고 조서에 써 있었습니다. 완력으로 지장을 찍었어요. 80일 구치소에 있다가 1심에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받고 풀려났습니다.” 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온 여섯가지 가훈그는 독립운동가이자 마지막 ‘경주 최부자’ 고 최준 선생의 손자 최염(80)씨다.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인 경주 최부자의 정신을 유일하게 이어온 종손이자, 일제와 군부독재 시대 경주 최부자의 도전과 핍박 역사의 산증인이다. 그가 회장을 맡고 있는 서울 종로구 운니동 경주최씨 중앙종친회 사무실에서 지난 1월14일과 22일 두차례 인터뷰를 했다.-경주 최부자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됐나요?“할아버지(최준)는 생전에 어른들 얘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13대조 정무공 최진립(1568~1636) 어른이 중시조입니다. 공조참판에 기용됐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병자호란 때 종과 수하를 데리고 경기도 용인에서 청군과 전투를 벌이다 전사했습니다. 우리 가문이 모두 13대까지 이어져왔는데 흔히 ‘9대(에 걸쳐) 진사, 12대 만석꾼’이라고 합니다. 다만 정무공은 청백리로 살았기 때문에 엄밀히 따져 부자는 아니었습니다.”-부자가 된 건 언제지요?“11대조인 최국선(1631~81) 할아버지 때부터입니다. 처음부터 부자는 아니었어요. 당시 지주는 소작인에게 소작을 주고 8할을 거둬가던 시절이었는데, 소작인들은 섣달이 되면 양식이 없어 장리를 썼어요. 장리는 양식을 빌려 두 배로 갚는 고리채였지요. 한번은 명화적(조선시대 횃불을 들고 약탈하던 강도집단)이 국선 할아버지 댁에 쳐들어왔습니다. 할아버지네 소작농과 그 자식들도 들어가 있었어요. 그런데 이 패거리가 양식은 안 가져가고 장리의 증표인 채권서류만 가져간 거예요. 이튿날 친척과 가복들은 ‘우리 덕분에 먹고살았는데 이럴 수 있느냐’며 배은망덕한 소작놈들을 경주 부윤에 일러 처벌해야 한다고 어르신에게 일렀죠. 한참 말이 없던 국선 어르신은 드디어 입을 열었답니다. ‘그만둬라. 남은 채권 문서도 모두 돌려주어라. 그리고 앞으로 소작료도 5할만 받도록 하겠다.’”1923년 경남 진주에서 열린 소작노동자대회에서 나온 요구사항이 ‘소작료를 5할로 낮춰달라’는 것이었으니, 최국선의 결정은 자그마치 300년을 앞선 ‘진보적인’ 조처였다. 최부자를 연구하는 학계에서도 사회적 나눔이 오히려 부를 불러온다는 선순환의 사례로 이 사건을 지목한다.
경주 최부자의 종손 최염(80)씨가 29일 울산 울주군 선산에서 가문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최염씨의 할아버지 고 최준 선생은 이 땅을 영남대의 전신인 대구대에 기부했고, 박정희 일가로 넘어간 영남대는 이 땅을 민간에 팔아, 최씨는 묘를 이장해야 할 처지에 놓았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소작농에 파격적인 소작료
임시정부땐 독립운동 자금줄 역할
해방 뒤 할아버지 최준은
전 재산을 기부해 대구대를 세워
삼성 이병철에게 무상양도했다“최고 대학 만들겠다”던
이병철은 약속을 저버렸다
대구대를 박정희에게 헌납했고
박정희는 영남대로 바꾸면서
최씨 집안의 고택·논·선산이
동시에 영남대 소유로 넘어갔다-어떻게 부를 쌓았습니까?“이앙법을 빨리 도입해 소출량을 늘렸어요. 땅도 많이 사들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정보가 잘 유통되지 않던 시대잖아요. 경주 일대에서 논 매물이 나오면 소작농들은 경쟁하듯이 달려와 최부잣집에 알렸어요. 소작농들은 자신의 지주가 최부자에게 땅을 팔면 소출의 절반을 가져갈 수 있었으니까요. 어르신들은 그렇게 논을 사들여 만석꾼이 됐습니다.”경주 최부잣집은 조선 중기부터 경주 지역에서 존경받는 유력 가문이 되어간다. 특히 ‘벼슬은 하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등 최씨 집안의 육훈은 정경유착을 멀리하면서도 서당을 짓는 등 교육사업에 매진하고 농업과 잠업 등 실용에 집중하는 가풍을 만들어왔다.마지막 최부자로 꼽히는 최준(1884~1970)은 독립운동가 안희제와 함께 백산무역을 운영하며 임시정부 재정부장을 맡아 독립운동 자금줄 역할을 했다. 경북 경주시 교동의 최부잣집은 구한말 의병과 일제 때 독립운동가의 은신처가 되었다. 최익현, 신돌석, 박상진, 최시형, 손병희 등 이 집을 거쳐 간 인사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1월29일 최염씨와 함께 경주의 최부잣집 교동고택(중요민속문화재 제27호)을 방문했다. 최씨는 서울에서 살지만, 이곳에 세간살이를 두고 가끔 묵는다. 최준이 묵던 사랑채 안에 들어가니 최준의 아호인 ‘문파’가 걸려 있었다.-지금 이 집은 가문의 소유가 아니지요?“네. 학교법인 영남학원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1967년 영남대에 넘어갔지만 식솔을 내쫓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1959년 상경했고, 10년 전까지 어머니가 사셨지요.”-어렸을 적 집안을 드나들던 독립운동 인사에 대한 기억이 있으신가요?“어렸을 적 최준 할아버지와 바로 이 방(사랑채)에서 함께 잤습니다. 워낙 드나드는 과객이 많았습니다. 대부분 돈을 달라고 온 사람들인데, 아무나 줄 수는 없었죠. 진짜로 임시정부에서 보낸 사람인지 확인해야 했으니까요. 일제의 첩자에게 쉽게 돈을 줬다가는 당신도 잡혀가실 터이니까요. 할아버지는 사랑채에서 열흘 보름 동안 과객과 술을 먹으며 이 사람이 진짜인지 따져봤습니다. 내가 아랫목에서 잠을 잘 때 할아버지가 과객과 나누는 통음소리와 담배연기가 흘러들어왔습니다.”-할아버지가 위험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까?“동학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1827~98) 선생이 우리 집에 한참 숨어 살았습니다. 홍길동이나 옛날이야기를 많이 해줬답니다. 부잣집 맏아들로 컸던 할아버지는 그때 독립정신을 깨우쳤습니다. 동학 3대 교주인 손병희(1861~1922)도 경찰을 피해 자주 오셔서 오래 묵고 갔습니다. 독립운동하신 분들로 울타리가 쳐진 셈이었어요. 사촌누나 남편이 박상진(대한광복회 총사령관)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결혼을 해보니, 장인도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고 처삼촌은 김응섭(임시정부 법무장관. 해방 뒤 김구와 남북협상파에 속했다)이었을 정도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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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때 독립운동 자금을 댄 ‘마지막 경주 최부자’ 고 최준 선생이 증손주를 안고 사진을 찍었다. 최염씨 제공
1900년대 초반, 과객이 끊이지 않던 경주 교동고택의 풍경. 최염씨 제공
최염씨의 셋째 할아버지 최완(최준의 동생)은 임시정부 의정원 회의에서 재무부 위원을 맡았다. 최완이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인데, 오래된 탓에 누구인지 가리지 못했다. 최염씨 제공
박근혜는 이사직 물러났지만
2009년 사분위 결정으로
박근혜 측근 이사들이 들어와
박정희리더십, 새마을정책…
낯 뜨거운 이름들이 우후죽순게다가 영남대 재단에선
최씨 집안이 기부한 선산 두 곳을
민간업체에 팔아넘겼다
업체는 조상묘들을 옮기라면서
이장 촉구문까지 내다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