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리우드 배우 발 킬머(Val Kilmer)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만에 인공지능(AI) 기술로 영화에 출연하게 되면서 영화계에 새로운 논쟁이 일고 있다.
18일 미국 연예매체 버라이어티에 따르면 킬머는 생전 출연 계약을 맺었던 독립영화 ‘무덤만큼 깊은’(As Deep as the Grave’에서 생성형 AI를 통해 재현된 모습으로 등장할 예정이다.
이 작품은 20세기 초 미국 남서부 지역에서 유적을 발굴하던 고고학자 부부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로, 킬머는 가톨릭 사제이자 아메리카 원주민 영성주의자인 ‘핀탄 신부’ 역에 캐스팅됐으나 건강 악화로 촬영에 참여하지 못했다.
영화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코에르테 보어히스 감독은 “이 영화는 처음부터 발 킬머를 중심으로 구상된 작품”이라며 “그를 제외하고는 이야기 자체가 완성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제작진은 당초 배우 교체나 캐릭터 삭제도 검토했으나,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제작 지연과 예산 문제로 재촬영이 어려워지면서 AI 기술을 활용한 재현 방식을 선택했다.
특히 이번 영화에서 킬머의 젊은 시절 모습은 유족이 제공한 사진 자료를 기반으로 구현됐으며, 중년의 목소리는 후두암 투병 당시 실제 음성을 활용해 사실감을 높였다. 제작진은 “배우와 캐릭터 사이의 상징적 연결성을 살리기 위한 선택”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유족의 동의를 얻어 진행됐으며, 출연료 역시 가족에게 지급된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미국 배우조합(SAG) 가이드라인을 준수해 제작됐다고 제작진은 밝혔다.
킬머의 딸 메르세데스 킬머는 성명을 통해 “아버지는 생전 새로운 기술이 스토리텔링의 가능성을 넓힌다고 믿었다”며 “이번 영화에 전적으로 지지를 보낸다”고 말했다.
앞서 킬머는 ‘탑 건 : 메버릭(Top Gun: Maverick)’에서도 후두암 후유증으로 목소리를 잃은 상태에서 AI 음성 복원 기술을 활용해 등장한 바 있다. 당시 그의 출연은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영화계에서는 이번 사례를 두고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한편에서는 배우의 유산을 보존하고 미완의 작품을 완성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평가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사후 디지털 재현의 윤리성과 배우 권리 문제를 둘러싼 우려도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AI가 영화 제작 방식 자체를 바꾸는 전환점이 되고 있다”며 “기술 발전과 함께 명확한 법적·윤리적 기준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1986년 영화 ‘탑건’에서 ‘아이스맨’ 역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발 킬머는 이후 ‘배트맨 포에버’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하며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후두암 투병 중에도 연기 활동을 이어가다 2025년 6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이번 사례는 AI가 단순한 보조 기술을 넘어, 배우의 존재를 사후에도 확장시키는 새로운 영화 제작 방식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다.